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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2000)「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역사비평사 리뷰 (서평)책 리뷰 2020. 12. 23. 10:40반응형
외로운 남자의 발자취, 『광해군 일기』
한명기(2000)「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역사비평사
서울대학교 이병도 교수의 논문 「광해군의 대후금정책」,『국사상의 제문제』(1959) 이전의 역사 속 광해군은 혼군(昏君)으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의 재위 기간은 어둡고 문란한 시대, 즉 혼조(昏朝)로 불렸다. 광해군 이후 조선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사서나 문집에서 그를 비판했고, 광해군의 업적은 의도적으로 폄하되거나 외면당했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물러난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반정(反正)’이라는 단어 속에도 표현되어 있다. 반정은 ‘올바른 상태로의 복귀’를 뜻하는 말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철저히 광해군을 깎아내렸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는 20세기 전까지 바뀌지 않았고 남양주시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지금도 왕릉(王陵)이 아닌 묘(墓)로 남아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들은 역사를 통해 광해군 정권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정권임을 설명해야했기 때문에『광해군 일기』편찬 작업을 서둘렀다. 보통 임금이 타계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총재관을 정점으로 하는 실록청(實錄廳)이란 임시 기구가 구성되어 실록 편찬을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 편찬에 참여하는 관리자는 당상, 낭청이라 불리는 중급 관리자로, 이들은 선왕의 기록들을 수집하는 일을 책임지며 실질적인 실록 편찬 작업을 맡는다. 선왕을 매 순간 따라 다니며 작성한 사초(史草)와 승정원에서 기록한 일기를 포함한 관청에 남아 있는 모든 기록을 모아 실록청의 사람들은 초초본(초고)을 작성한다. 그 후 사관들을 지휘하는 당상들은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고 누락 된 내용을 덧붙여 수정한다. 총재관과 대제학 등의 정승급 인사들은 이렇게 완성한 원고를 검토하여 중초본을 만들고 이를 알아보기 쉽게 바른 글씨로 정리한 것이 정초본이다. 『조선왕조실록』은 바로 이 정초본의 내용을 인쇄한 것이며, 실록이 완성되면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은 물로 씻어버리는 과정, 즉 세초(洗草) 과정을 통해 폐기된다. 당시 부족했던 종이를 재활용하고 이후 불필요한 시비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광해군일기』의 경우 정서본과 중초본이 모두 남아 있다(광해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쫓겨난 임금으로 기억되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실릴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서본과 중초본의 내용을 비교함으로써 광해군이라는 인물이 서인들에 의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가령,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는 ‘此果和賊之意乎’, 즉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인가?’라는 구절이 있다. 중립외교를 펼쳤던 광해군은 자신이 누르하치와 화친을 맺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서본에는 위의 언급이 먹으로 지워져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 광해군을 재조지은 베푼 명나라를 배신하고 청나라와 손을 잡은 왕으로 몰아가야했던 서인들은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다. 분명히, 『광해군일기』에는 서인들의 주관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서인들은 광해군의 발자취 모두를 왜곡하지는 않았고 당시의 사정으로 인해 중초본이 남아 있다. 이를 토대로 역사가와 현대인들은 광해군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어떠한 점에서 비판 받을만하고 어떠한 점에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 또한 광해군이라는 인물과 전후 조선시대의 상황에 빠져볼 수 있었고, 사료를 검색하며 교과서를 통해 배웠던 광해군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명분론의 입장에서 광해군을 비판했던 서인들의 입장도 있고, 근래의 영화 ‘광해’(추창민,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에서처럼 광해군을 전후복구와 민생안정책에 힘쓴 훌륭한 군주로 평가하는 입장도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반되는 평가가 병존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책을 읽기 전 들었다. 하지만, 광해군의 즉위에서부터 폐위까지의 삶과 그가 살아가야 했던 시대 배경, 당시의 대립 세력, 정책을 하나하나 마음으로 느끼며 광해군을 다시금 바라보자 왜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 파악할 수 있었다.
광해군의 즉위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생했다. 왜군은 무서운 기세로 조선의 성들을 점령하였고, 같은 해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패하면서 조정에는 큰 위기감이 돌게 된다. 민심도 일본의 침략과 함께 요동쳤으며 이에 따라 조선에 대한 충성심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피난을 가는 긴박한 상황에서 우부승지 신잡은 조선의 장래와 민심 수습을 위해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고 건의 했고 선조의 둘째 아들 광해군은 단 하루도 걸리지 않은 논의 과정과 소수의 신하들의 구두 동의만으로 왕세자에 책봉 되었다.
나는 여기서부터 광해군의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보통 왕세자 책봉은 긴 시간 동안 조정의 신하와 왕이 심사숙고하여 결정하는 사안이며, 이 과정에서 왕세자를 뒷받침할 지지 세력이나 믿을만한 인물들이 왕세자 주변에 붙는다. 하지만 18세의 광해군에게는 아직 적당한 지지 기반이 없었고, 단 하루 만에 소수의 신하의 구두 동의로 왕세자로 책봉되었기에 전쟁 후 그의 입지는 위태로워지기 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세 살 때 어머니마저 여읜 광해군은 궁궐에 믿고 의지할만한 사람들이 없었고 자신보다 나이 어린 선조의 계비(繼妃)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반이 취약하다는 사실과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군의 탄생은 광해군에게 항상 스트레스로 작용했고 조정에는 역모의 가능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실제로 광해군 재위기간은 역모 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했던 기간으로 꼽힌다.
비록 광해군에게 튼튼한 기반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임진왜란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탁월한 면모를 보이며 지지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한다. 선조는 피난을 가면서 광해군에게 분조를 맡겼고 동시에 인사권과 상벌권도 넘겨주었다. 이에 광해군은 조선 8도를 돌면서 전쟁을 수행하며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조선 조정이 건재함을 보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하였다. 의병활동과 실천을 강조한 강경파 북인, 즉 대북파는 자연스럽게 광해군의 지지세력이 되었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서인들조차 『광해군일기』에 광해군의 전쟁수행 기록이나 민심수습과 관련된 기록을 삭제하거나 곡해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서인들도 광해군의 난중 활동은 존중하고 광해군의 능력을 인정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혹은 명분과 사대부로서의 도리를 강조하는 서인들에게 당시 광해군의 활동을 깎아 내릴 명분이 없었을 수도 있다. 자신들이 반정을 통해 폐위시킨 왕이지만, 전왕의 발자취를 통째로 곡해하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왕세자 중 거의 유일하게 8도를 직접 돌아다니며 밖에서 생활하였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광해군은 굶주림과 지병으로 죽어가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조정의 그 어떤 대신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또한 광해군은 전쟁을 몸으로 겪으며 무너져 버린 백성들의 충성심, 국왕에 대한 권위, 사회 윤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전쟁 이후 이를 다시 세울 방법을 구상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광해군은 선조와 서북변방인 평안도와 압록강 일대를 돌아다니며 북방의 상황(누르하치 세력의 성장)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었다. 1596년 3월 신하와 관료들이 모인 경연 자리에서 누르하치 세력에 대한 대응이 논의되고 있었고 북방의 현황을 파악하고 있지 못한 신료들이 왈가왈부하자 광해군은 “열 사람이 멀리서 보는 것은 한 사람이 직접 본 것만 못한 법이오. 평안도 내지의 사정은 내가 일찍이 직접 보았소. 피난길에 보아서 그런지 지금도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있소.”라는 말을 남겼다. 이처럼 조선 내부의 상황과 국제 정세를 피부로 느낀 광해군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을 하나하나 펼쳐 나가게 된다.
우선 광해군의 대표적인 민생안정책으로는 대동법이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의 염치는 사라졌고 점점 더 많은 관리들이 공물 방납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방납인들은 노골적으로 공물 징수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갔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와 같은 어려운 당대의 서민들의 생활을 목격한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하여 방납의 폐해를 시장하였다. 또한 난중 질병으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이에 대한 해결방안을 고민하였고, 즉위 후 유배를 간 허준이 동의보감(허준이 광해군 2년(1610)에 저술한 의서로 조선의 토산 약재를 활용하는 방법과 조선인의 체질에 맞는 치료방법을 담고 있다.)을 쓸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그 결과 조선인의 체질에 맞는 약초와 치료 방법을 담은 동의보감이 1613년 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광해군은 윤리체계가 무너진 당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동국신속삼강행실도(임진왜란 중 국가 혹은 부모를 위해 몸 바친 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책으로 충효의식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출간되었다.)를 간행한다. 이러한 광해군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광해군은 전후 조선의 시대적 과제를 비교적 정확히 읽어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당시 조선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 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이라는 국가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다시금 흔들려 위기를 맞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음으로 광해군의 대표적인 정책인 중립외교 정책은 그가 얼마나 조선과 명나라, 누르하치와의 외교관계를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정기 경연 자리에도 종종 자리를 비웠던 광해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명나라와 여진족의 소식은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명령을 신하들에게 하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을 몸으로 겪은 광해군은 더 이상 조선이라는 국가가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국왕이라는 위치에 서 있는 그는 더더욱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만약 그가 직접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여진의 성장을 목격하지 않고 명나라와 건주여진 간의 갈등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대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어내었고 서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외교정책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은 짧은 기간이나마 왜란 이후 조선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광해군의 기록만 살펴보면 광해군은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다. 하지만 광해군의 모든 정책이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실패한’ 군주로도 파악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평가에 앞서 광해군 초기 정권의 모습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우선 광해군은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이이첨,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를 중심으로 정권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이덕형이나 이항복과 같은 서인과 남인의 원로 정승들도 정권에 융화시켰다. 학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였던 서인들은 국정 전반을 담당하며 광해군을 보좌했고, 대북파 인사들은 인사권이나 언론을 맡아 광해군의 왕권을 보위하였다. 당파 간의 갈등을 적절히 조절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광해군은 성공적으로 민생안정책을 펼 수 있었고, 서인과 남인의 불만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서인과 남인의 원로 격 정승들(이덕형 이항복 등)이 죽자 이이첨과 같은 대북파 인사들은 왕권 강화를 빙자하여 자신들의 권력을 키워나가며 권한을 남용하였고 조정의 분위기는 급격히 냉각되어 갔다. 이 때 광해군은 붕당 간의 갈등을 적절히 중재하지 못하였고 스스로 몰락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즉위년 1608년 2월 23일 광해군은 당파 사이의 대립을 개탄하며 당파 철폐에 대한 자신의 강한 의지를 드러냈지만, 끝까지 당파 간의 갈등을 막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이첨, 정인홍 등의 대북파 세력은 광해군의 지지기반이었으며 서인들과 남인들의 견제로부터 광해군의 왕권을 보위했던 세력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말기에 이르자 이들 세력은 광해군의 몰락 계기를 마련했으며 지속적으로 광해군을 괴롭혔다고 생각한다.『광해군일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1613년에 발생한 은상살해사건이 범인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역모 사건으로 확대 된 것은 이이첨의 사주 때문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 이이첨이란 대북파의 수장은 영창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을 때 강화부사 정항을 사주하여 영창군을 죽였다는 기록이 『광해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영창대군을 제거한 대북파는 이제 인목대비를 폐위하기 위해 끊임없이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다음의 기록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광해군은 이를 거부하며 버텼다.
『광해군일기』10년 1월 2일
내 운명이 기박해서 여러 차례나 망측한 변을 당하고 보니 괴롭고 한스럽기만 하여
곧장 귀를 막고 멀리 떠나고 싶을 따름이다. 이 어찌 내가 들을 이야기인가. 다시는 말하지 말라.
위와 같은 기록들을 살펴보면 과연 가장 많은 역모 사건이 있었던 광해군 대에 실제 서인들이 계획한 역모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그리고 만약 상당수의 역모 사건이 대북파의 조작에 의해 기획되었다고 한다면 광해군은 자신이 믿고 의지했었던 지지 세력으로부터 배반당한 것이 된다. 대북파들은 끊임없이 역모론을 제기하였고 광해군은 신하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초기 서인들은 광해군에게 그다지 적대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이첨과 같은 인물은 서인과 광해군 사이의 신뢰를 깨버리는데 큰 영향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서인들은 광해군 정권에 반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말년에 자신의 호위부대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까지도 믿지 못하여 수차례 훈련대장을 교체하였고, 훈련도감의 군사들도 광해군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결국 훈련도감의 군사가 인조반정 때 동원된 군사들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인 세력이 궁궐에 침입하자 별다른 저항 없이 궁궐을 열어주게 된다.
궁과 궐에는 많은 구성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공개적이면서도 많은 비밀이 오가는 공간이 바로 궁궐이다. 이런 곳에서 주변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가고 고립감을 느끼며 나날을 보내던 광해군은 오히려 폐위를 해방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극도의 불안감과 고립감에 시달리던 광해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려실기술』
광해군이 궁중 깊숙한 곳에 몸을 숨기고 사람을 시켜 찾게 하여 찾지 못하면 기뻐하고 찾으면 기뻐하지 않았는데
변이 있을까 염려하여 몸 숨기기를 연습했던 것이다.
게다가 전쟁을 함께한 대북파 신하들이 그들의 권력 확보를 위해 자신에 대한 역모 사건을 자작해 보고하는 궁궐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의 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보통 유배를 가는 왕족들은 자신들이 궁궐에서 누렸던 삶에 비해 너무나 열악한 삶에 절망하여 오래 살지 못하였다. 하지만 광해군의 경우 폐위 후 19년이나 더 살았다. 비록 아내를 유배 기간 중 잃긴 하지만 야사 기록에 유배지의 밥을 주는 주모가 광해군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불평을 했다는 언급이 있을 만큼 꿋꿋이 살아갔던 것으로 파악된다. 어쩌면 ‘왕이 된 남자’ 광해군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실패한 군주, 광해군’의 발자취는 궁궐 중건 노력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1611년 창덕궁이 완성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생안정을 그렇게나 중시했던 광해군이 왜 무리해서 경덕궁, 인경궁 등의 궁궐들을 대규모로 신설했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족한 재원은 민간의 토지에서 쌀이나 포목으로 거두어 충당했으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망은 하늘을 찔렀다. 한 가지 가능성을 굳이 생각해보자면 아마 광해군은 떨어진 조선 조정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은 왜군이 아닌 하층민들의 조선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불탔으며 광해군의 형 임해군은 임진왜란 중 백성들이 일본에 흘린 정보 때문에 체포된다. 이를 목격한 광해군은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고자하는 욕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위해 궁궐 중건에 착수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권위라는 것은 빼어난 건물, 성곽과 같은 외적인 요소로 다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지도자 혹은 통치자의 권위는 대중의 우러나오는 존경과 신뢰가 있을 때 바로 설 수 있다. 왕실의 위엄을 세우고자 했던 광해군의 궁궐 중건 정책은 백성들에게는 위압적인 정책에 지나지 않았으며 기근과 함께 하층민의 불만 및 사회 동요를 유발했다. 또한 백성들을 강제 동원하는 위치에 있던 권반과 같은 신하들은 자신들이 ‘도적질을 하는 신하’가 된 것 같다고 한탄하는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신하들도 하나 둘 광해군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집권 초기 시대적 과제를 정확히 짚어내었던 광해군이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의 여러 정책 중 가장 아쉬운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말이 있을 수 없지만 만약 광해군이 궁궐 중건사업을 강행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민중들의 비난이나 원망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광해군일기』와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을 바탕으로 광해군의 자취를 돌아보며 몇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우선, 한 인물의 보고 싶은 측면만 바라보는 좁은 시야와 마음가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조선의 왕,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린다. 하지만 이 평가는 서로 다른 것이지 한 쪽이 틀린 것은 아니다. 광해군의 어떤 면모를 부각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뿐이다.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첫 발걸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역사에 대한 서로 다른 평가가 있을 때, 각각의 평가에 따른 근거를 공부하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역사를 들여다볼 때 요구되는 태도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평가를 부정하는 것 또한 역사를 곡해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광해군 폐위 이후의 서인들처럼 미래와 현재를 위해 역사를 곡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해가 된다. 객관적으로 냉철히 역사를 분석하여 선대의 잘한 점과 못한 점을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야말로 미래와 현재를 위한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한다. 역사에서의 가정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만약 외롭게 살아간 광해군의 발자취가 온전히 남아 후대에 전해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조금이나마 달라졌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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